[연재] 나의 익신마을 설명서2…익신슈퍼에서 보낸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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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나의 익신마을 설명서2…익신슈퍼에서 보낸 오후
  • 최난영
  • 승인 2022.07.26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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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신슈퍼…과거를 기억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억의 공간'

‘나의 익신마을 설명서’는 소설과 스토리텔링 작업을 하는 최난영 작가가 지난 5월부터 오는 10월까지 ‘전남 예술로 파견사업’을 통해 광양시 광양읍 익신리에 위치한 ‘익신마을’에서 활동한 내용을 총 8회에 걸쳐 기록‧연재합니다. 두 번째 주제는 ‘익신슈퍼에서 보낸 오후’입니다. <편집자 주>

어렸을 적 누구든 한 번쯤은 ‘슈퍼’의 주인이 되는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나는 어느 시점에 이르기 전까지 그 상상을 꽤 자주 했다. 주로 엄마에게 과자나 사탕 따위를 사달라고 졸랐다가 거절당했을 때였던 것 같다.

학기 초면 어김없이 나눠주던 ‘기초 조사서’. 그 말미쯤 등장하는 장래 희망란에 ‘영락슈퍼 주인’이라고 쓴 적도 있다. 구체적이고 노골적인 어린 날의 꿈. 그 배경이 된 영락슈퍼는, 그 시절 내 단골 슈퍼였다.

나는 어른이 되면 돈을 많이 벌어 영락슈퍼 아줌마를 찾아가 그곳을 인수하리라 다짐했다. 엄마는 지우개로 내 꿈을 박박 지웠다. 의사나, 선생님 같은, 뭐 그럴싸한 것을 꿈꾸라고 일러줬다. 내가 쓴 글씨는 지웠을지 몰라도 의지는 더 선명해졌다. 미래를 위해 영락슈퍼 아줌마와 돈독한 친분도 유지했다. 물론 대형마트가 곳곳에 생겨날 때쯤 그 꿈도, 영락슈퍼도, 잊었지만 말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와 같은 꿈을 꾼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감히 추천한다.
 “그대여, 익신슈퍼로 오라. 당신이 잊은 것을 되살 수 있다.”

‘익신슈퍼(익신 구판장)’ 전경
‘익신슈퍼(익신 구판장)’ 전경

허무맹랑한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금 떠올린 것은 얼마 전이었다. 마을 입구, 그러니까 익신회관 정면에 자리한 ‘익신슈퍼’를 발견한 때부터다. 슈퍼는 도로변에 입간판이 있긴 하지만 건물에는 간판이 없다. 가게 명칭과 주 판매 품목이 간단히 적힌 플래카드가 건물 입구에 나붙어 바람에 펄럭일 뿐이다.

나는 몇 달째 익신마을을 드나들면서도 그 존재를 몰랐다. 익신마을은 농촌 마을로 보기는 어렵다. 산단과 인근에 도심을 끼고 있으며 주거와 산업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마을이다. 이런 곳에 여태 운영 중인 마을 슈퍼가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중·대형 마트와 편의점, 식자재마트 등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온라인을 통한 장보기 문화가 성행하면서 소규모의 동네 슈퍼는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익신슈퍼는 여전히 70여 년의 역사(그 이상일 수도 있다)를 끌어안고, 오늘도 운영 중이다.

주 고객은 단연 마을주민이다. 그 외에도 건너편 공단에서도 오고, 도로를 지나다 들르는 손님도 있다. 그들이 주로 찾는 품목을 철제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해 둔 것이 눈에 띈다. 슈퍼의 중앙에는 테이블 몇 개와 의자도 놓여있다.

나는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하나 꺼내 계산하고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슈퍼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선풍기의 방향을 내 쪽으로 향하게 한다. 덕분에 여름이 씻겨 달아났고, 어린 시절 슈퍼에 왔을 때 마냥 입안에서 달큰한 맛이 감돌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익신슈퍼의 내부’
깔끔하게 정돈된 ‘익신슈퍼의 내부’

익신슈퍼는 마을주민을 대상으로 공개입찰을 통해 삼 년마다 운영자를 모집한다. 현재 익신슈퍼 운영자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익신슈퍼에 내비치는 나의 뜻밖이고 사적인 관심에, 친절하게 응해주었다.

그는 현재 이년 육 개월 차, 이 슈퍼를 운영하고 있다. 운영자이기에 앞서, 과거에는 주 이용객이기도 했다. 그는 이 공간에 묻어나는 자신의 어린 날을 내게 들려줬다. 그는 이곳에서 과자도 사 먹고, 볼펜, 연필 같은 학용품도 구매하곤 했다. 그가 ‘광양 남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게 안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진열된 물건들의 어느 틈바구니에서 ‘슈퍼’라는 단어가 주는 나만의 아련한 기억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익신슈퍼의 원래 명칭은 ‘익신구판장’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취급하는 물건도 계속 변해왔지만, 마을 어르신들의 입맛과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만은 분명하다. 라면도 직접 끓여 팔고, 막걸리 안주로 두부김치와 몇 가지를 더 판매한다고 했다. 지금은 기본 되는 품목만 놓고 운영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마을 애경사에 필요한 물품까지 두루 갖췄던 곳이다.

익신슈퍼 운영자는 “예전에는 말입니다. 비포장도로라 읍내에 나가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물론 지금처럼 대형마트도 없었고. 마을에서 결혼하거나 상을 당하면 그 필요한 것을 전부 여기서 사다 썼지요. 또 익신 산단이 들어서기 전에는 마을주민들이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번기가 되면 하루에 막걸리가 한 트럭씩 들어왔다니까요. 그만큼 이곳을 찾는 이가 많았고 찾는 물건도 많았으니 가게 안이 지금과 달리 그득그득했습니다. 사람과 물건으로 말이에요.”라고 전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을 어르신 몇 분이 택배를 찾으러 오시고, 막걸리를 드시고 가기도 했다. 그에게 마을 어르신들은 가족과 같다. 긴 세월 동안 익신마을의 변화와 발전을 공유했으며 많은 일들을 함께 겪어왔다.

창밖의 여름은 여전히 내리쬐는 중이었다. 새삼 나의 영락슈퍼는 안녕한지 궁금해졌다. 서둘러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보았다. 그 자리에는 재가 노인시설이 들어선 지 오래였다. 서글픈 마음에 괜스레 음료수병에 맺힌 물방울만 훑어냈다. 나는 한참을 더 그곳에 머물며 오후를 지불하고 추억을 되샀다.

익신슈퍼. 그곳이 가진 의미는 크다. 단순하게 물건을 판매하고 구매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고 나눌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 공간이 가진 이야기와 추억만큼은 시대와 소비의 변화로 인해 쉬이 증발해버리지 않기를. 마을과 누군가의 긴 시간을 머금은 채 우리 곁에 계속하길 빌어본다.

* 최난영 작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예창작학을 전공했다. 단편소설 「울어요,제발」로 제2회 김승옥문학상 신인우수상을, 「쿠오바디스」로 제6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에서 단편부분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부산국제영화제 북투필름에 선정, 「행운을빌어요」로 고즈넉이엔티 메타버스 장르소설 공모전 단편소설부문을 수상했다. 산문집 「블라블라블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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