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들의 눈물꽃, 이제는 열린 마음으로 닦아주길"
상태바
"유족들의 눈물꽃, 이제는 열린 마음으로 닦아주길"
  • 김명자
  • 승인 2022.10.20 07: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순사건 광양유족회 유족 김명자
여순사건 광양유족회 김명자 유족
여순사건 광양유족회 김명자 유족

광양에 사는 유족 김명자입니다. 

작년 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장면을 TV에서 지켜보면서 기분이 찹찹했습니다.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70여 년이 넘도록 남모르게 피눈물을 흘리며, 부모도 모르고 살아올 때는 위로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더니 왜? 인제 와서…

올해 초 동사무소에서 신고 접수를 재촉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계속 망설이다가 숙부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첫 마디가 “아서라, 그렇게 모질게 고통받고 기죽고 살았으면 됐지, 인제 와서 또 가슴 후빌 일 있냐?” 하시면서 말렸습니다.

제가 “국회에서 통과했다 하니, 옛날 같은 일이야 있겠습니까?” 했더니, 숙부께서는 “정권이 바뀌면 또 어찌 될지 모른다. 잘 생각해서 해봐라.” 하셨습니다. 그날 이후 며칠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눈물 흘리면서 하셨던 한마디! 한마디! 가슴 깊이 쌓고, 또 쌓아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마을 이장이셨는데 그 당시 마을에 ‘산사람’이 자주 내려오는 관계로 친구 서너 명과 읍내에 방을 구해 놓고 일이 늦어지면 읍내에서 주무시기도 했답니다. 할머니 말씀이, 아버지가 읍내에서 주무시던 그날 밤 읍에서 콩 튀기는 듯한 총소리가 저녁내 들려서 날이 밝자마자 읍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읍내 집으로 미친 듯이 가보니 신발만 덩그러니 뒹굴고 있고, 아버지는 없었다고 합니다. 벽에 걸린 옷걸이에는 아버지의 바지만 허리끈이 매여진 채 휑하니 걸려있었답니다. 

어젯밤 경찰들이 다 잡아갔다는 집주인의 말에 할머니께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심장이 내려앉았다고 합니다. 경찰들이 밤새 집집마다 뒤져서 젊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학교운동장에 모아두고 점심때, 트럭에 실어 쇠머리재로 끌고 갔답니다.

그때 마침 한 사람이 트럭에서 뛰어내려 도망을 갔고, 경찰들이 바로 쏘아 죽였답니다. 그걸 보고 놀란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도망을 가니 그 자리에서 전부 다 쏘아 죽였다고 합니다. 죄 없는 젊은 사람들을 한마디 변명도 듣지 않고, 재판도 없이, 새벽에 잡아가서 하루를 넘기지 않고 총을 쏴 죽이다니 기가 막힌 일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그날 밤 잡아간 사람들을 쇠머리재에서 죽였다는 소문이 돌아서 식구들이 달려갔더니, 얼마나 총을 쐈는지 시신들은 피범벅이 되어 아버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아버지 시신을 찾으려고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서 도랑물을 퍼 날라 일일이 시신들 얼굴을 씻고 또 씻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찾았을까, 겨우 아버지를 찾아 동네 사람들이 나무로 만든 사다리에 시신을 얹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온 식구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당시 6살 된 삼촌이 들여다보니 아버지 목에 총탄 자국이... 차마 이럴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변을 당한 그날 밤, 산사람들은 단 한 명도 내려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찰들은 애먼 주민들만 몰살시킨 셈이었고, 피난만 안 갔으면 살았을 일이라며 할머니는 통곡하셨고, 할아버지는 책상이며 필기도구 등 아버지의 물건들을 필요 없다며 마당으로 다 내던져 버렸습니다. 널브러진 물건들처럼 우리 집은 그때부터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술로 세월을 보내셨고, 출타했다가 귀가가 늦어져서 찾아 나서면 들판에 누워서 주무시기 일쑤였습니다. 할아버지를 깨우면 “여기가 우리 아들이 누워있던 자리다.” 하시며 우셨습니다. 그 자리는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를 메고 오다가 시신이 무거우니 잠시 쉬었던 자리였습니다. 할머니는 한숨과 눈물로 매일 밤을 지새우고, 남은 아들들을 또 잃을까 집에만 있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친정으로 떠나버렸고, 저는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부모형제 없이 한 많은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일가친척들이 우환이 생기면 그때마다 점집을 찾았는데, 점쟁이는 속도 없이 “일가 중에 나가서 죽은 귀신이 걸려서 그런다.”는 소리를 자주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저승에서도 애먼 소리를 많이 들었고, 할머니는 그때마다 통곡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눈물이 쌓이고 쌓이면 눈물꽃이 된다고 합니다. 부모없이 살아온 유족들의 나이가 이제는 다들 저 세상으로 떠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나이에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모든 것을 떠나 유족들 마음 속에 핀 눈물꽃, 이제는 열린 마음으로 닦아주셨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여순사건 광양유족회 유족 김명자 올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